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하인츠 구데리안 (문단 편집) ==== [[프랑스 침공]] ====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를 침략한 독일에 대해 [[가짜 전쟁|선전포고를 하였으나 실질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그 덕택에 독일은 위기를 넘길 수 있었으나 세계 최대의 해군국 대영제국과 유럽 최대의 육군국 프랑스와의 대결은 피할 수 없었다. 이 상황에서 1939년 11월, 전쟁대학 동기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 코블렌츠에 주둔해 있던 구데리안을 베를린으로 불러낸다. 만슈타인은 새로운 부대인 기갑사단을 활용하면 프랑스와 벨기에의 경계 아르덴을 돌파하고 프랑스 내륙으로 진격할 수 있는지 기술적, 전술적 자문을 얻으려 했다. 구데리안은 그간 프랑스군이 보인 행동으로 파악한 작전 교리, 돌파지점에 대한 지형과 항공사진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하나의 조건을 충족한다면 무조건 성공한다는 답을 주었다. 그 조건은 독일군이 보유한 9개 기갑사단을 모두 [[스당]]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의 대답에서 확신을 얻고 곧바로 [[낫질 작전]]을 입안해 총참모본부에 올린다.[* 훗날 만슈타인은 구데리안이 자신의 작전을 검증해주었을 때 깊이 안도했다고 회고했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낫질 작전은 채택되었다. 만슈타인이 구데리안과 그의 제19 기갑군단을 스당 공격의 선봉에 세울 것을 상정하고 작전을 짰기에, 구데리안은 코블렌츠에서 수차례 이루어진 워게임에 참여했다. 집단군 사령부는 대부분 작전의 도박성을 우려하며 보다 안전하고 소극적인 방식을 채택하려고 했다. 구데리안은 성공을 믿어 의심치 않는 만슈타인의 원래 계획을 최대한 지키기 위해 상관과 동료들과 수도 없이 싸워야 했다. 어찌나 분란을 일으켜댔는지 이듬해 2월, 구데리안이 휴가를 내고 만슈타인을 보러 베를린에 간다는 소식을 들은 만슈타인의 후임자가 만슈타인에게 편지로 제발 구데리안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했다. 결국 만슈타인과 구데리안이 구상했던 원본에 비해 불완전한 낫질작전의 실행이 결정된다. 어쨌든 구데리안은 스당 공격을 맡았지만, 이후의 전략에 대해서는 총참모본부에게 하달받지 못했다. 그가 소속된 A집단군의 계획은 스당에 강력한 교두보를 만든 뒤 파리 방면으로부터의 반격에 대비하거나 적의 주력을 측면에서 공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데리안은 총참모본부의 전략에 따르는 대신 만슈타인과 논의한 대로 대서양을 향해 쉴 틈 없이 달려 벨기에에 집결한 적의 주력을 고립시킬 마음을 먹고 있었다. 총참모본부는 작전 성공 가능성을 확신하지 못했으므로 공세가 돈좌되면 다시 기갑사단을 물려 보병부대를 도와야 한다는 단서를 걸기까지 했다. 구데리안은 이 명령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으며 돌파가 실패할 가능성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작전이 시작되자 구데리안의 3개 기갑사단은 서로를 보조하며 스당을 공격했다. 초기 혼란, 스톤고지에서 격렬한 저항이 있었으나 결국 계획보다 빠르게 스당을 함락시켰다. 기갑사단들은 이미 구데리안으로부터 상부의 명령을 모두 무시하고 대서양까지 달리라고 지시받은 상태였다. 그의 부대들은 북서쪽으로 쉴 틈 없이 진군하며 실탄조차 준비하지 않은 적의 후방부대들을 닥치는 대로 사로잡기 시작했다. 집단군 사령부, 총참모본부, 히틀러는 구데리안에게 수차례 정지명령을 내렸으나 기갑부대들은 무전기를 꺼가며 당당하게 명령을 무시하고 내달렸다.[* 결국 구데리안은 상관인 제1 기갑집단 사령관 클라이스트와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 이는 룬트슈테트에 의하 가까스로 해소된다.] 구데리안의 진격은 지난 10년간 그가 준비한 대로 완벽하게 이루어졌으며 프랑스군의 신중한 대처와 공황 때문에 [[샤를 드 골]]에 의한 프랑스 제4 흉갑기병사단의 반격을 제외하고는 치명적인 위협에 노출되지 않았다. 결국 3개 기갑사단은 대서양까지 돌파에 성공하고 서부 연합군의 주력을 벨기에 프랑스 국경지역에 고립시켜 버린다. 낫질작전이 성공한 것이다. 이제 구데리안은 대서양의 요새와 항구인 칼레, 볼로뉴, 됭케르크를 공략 목표로 삼는다. 구데리안은 3개의 기갑사단이 각각 목표를 공략할 수 있었지만 정지명령에 의해 됭케르크 공략을 포기해야 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 정지명령이 기갑사단에게 전공이 모두 넘어가는 것을 시기한 괴링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공군은 됭케르크를 열심히 공격했으나 서부연합군의 주력은 이 정지명령을 통해 귀중한 시간을 벌고 도버해협을 건넌다. 폴란드 전역에 이어 프랑스 전역에서도 구데리안은 무전기가 설치된 지휘차량을 타고 전선을 직접 뛰어다니며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하고 문제에 빠진 예하 부대들을 지원했다. 그가 군단 사령부를 최전방으로 8번이나 옮겨가며 부대를 전진시키는 동안, 프랑스군 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은 전선에서 50km 떨어진 곳에 사령부를 놓고 오토바이 전보로 반나절 전의 전황을 전달받으며 지휘하고 있었다. 병사들은 신출귀몰하게 나타나 전선을 통제하는 그에게 '재빠른 하인츠'라는 별명을 붙였다. 프랑스 전역에서의 활약으로 그는 상급대장으로 진급한다. 그러나 프로이센의 원로 장성들에게는 히틀러의 신임을 믿고 자신들의 명령에 신경조차 쓰지 않는 이단아로 찍히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